교보빌딩 뒷편의 미진(美進)은 메밀국수로 반세기 동안 고객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 물론 이 집의 메밀국수는 한국음식이 아니다. 우리에게 '소바(蕎)'로 알려진 일본음식이다. 메밀은 물론, 메밀가루로 국수를 내는 방법이 우리나라에서 건너갔으니 일본식 메밀국수는 우리가 역수입한 음식인 셈이다. 메밀국수의 맛은 양념장에 달려 있다. 국수도 쫄깃쫄깃한 맛이 살아날 정도로 알맞게 삶아져야 하지만 국수에 찍어먹는 양념장이 맛을 좌우한다. 단골들이 말하는 미진의 감칠맛은 잘 삶아진 면발과 양념장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풍미다.
"우리는 '미진공식'에 따라 양념장을 만듭니다. 들어가는 재료만 14가지나 됩니다." 미진의 두 번째 주인 이영주(李暎珠·66)씨도 맛의 비법을 양념장에서 찾는다. 양념장 만들기의 첫 단계는 무 다시마 쑥갓 파 등을 넣고 삶는 것이다. 그런 다음 이른바 미진공식에 따라 멸치 가다랭이 등 다른 재료를 순서대로 넣고 끓이기를 여러 차례 반복한다.
메밀을 재료로 한 음식은 국수 외에도 메밀묵, 비빔냉면, 메밀총떡이 있다. 지하에 국수를 뽑는 시설을 갖춰 놓고 있다. 메밀은 평창 봉평 등 강원산을 주로 구입한다. 메밀국수는 계절음식이다. 여름철 한철이 성수기라 메밀국수 한 종류만 갖고는 현상유지도 어렵다. 그 해결책으로 음식의 가짓수를 늘렸다. 한때는 젊은 세대를 위해 저녁에 생맥주까지 팔았다.
미진의 창업자는 고 안평순(80년 60세로 타계)씨다. 이씨는 스스럼 없이 '고모'라고 부르는 안씨와의 만남을 숙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78년 미진을 인수했다.
"자식이나 다름 없는 가게다. 너에게 줄 테니 늘 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잘 이끌어가라. 부디 미진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고 잘 지켜주면 좋겠다." 건강이 기울어 가던 안씨는 눈물을 쏟으며 미진을 맡겼다. 당시 이씨는 북창동에서 대형 일식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안씨가 가끔 들리면서 인연이 닿았다. 둘은 자연스럽게 마음을 터놓는 사이로 발전했고 이씨는 안씨를 '고모라고 부르게 됐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의 관계였지만 친정 어른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이씨는 언젠가 "저도 고모님처럼 깨끗한 메밀국수집이나 했으면 마음고생이 덜 하겠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우연히 주고 받은 그 대화를 고인은 마음 속에 묻어두었다가 자신의 삶을 정리하면서 이씨에게 미진을 넘긴 것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한 이씨는 음식장사는 꿈도 꾸지 못했다. 결혼 후에도 국영기업체에 근무하는 남편 덕분에 생활에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남편이 직장 일에 적성이 맞지 않아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서 장래에 대비하자는 생각에서 일식집을 차렸다. 미진을 넘겨 받은 이씨는 보다 넓은 공간을 찾다가 현재의 자리(60평)로 이전했다. 며느리가 곁에서 거들며 대를 이을 준비를 하고 있다.
안씨가 지금의 교보빌딩 자리에 미진을 연 때는 54년. 영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종로의 대로변으로 옮겼다. 안씨는 한때 일본에 거주하면서 메밀이 건강식품이라는 점에 매료돼 조리법을 배웠다고 한다. "그 분은 성격이 무척 깔끔했습니다. 메밀국수도 성격처럼 단백하고 맛깔스러워 장안의 명사들이 단골로 드나들었거든요." 이씨는 늘 한복차림의 고인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음식점은 물론이고 그 주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무척이나 인색하던 시절이었지만 안씨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서울에서 제일 맛 있은 음식을 내놓는다는 긍지를 잃지 않았다. 미진의 손님 역시 최고의 명사라고 여겼다. 그런 마음가짐과 단아한 성품이 어우러져 미진은 자연스럽게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갔다.
미진의 고객은 대부분 단골이다. 개업 때부터 드나들던 단골이 무척 많다. 박정희 전대통령도 생전에 미진의 메밀국수를 즐겼다. 안씨는 물론이고 이씨도 주방장을 대동하고 여러 번 청와대에 들어갔다. 무용가 고 김백봉 여사는 미진의 찬미자였다. 단골음식점을 물으면 늘 미진을 꼽았다. 말년을 청주에서 보냈던 고 김기창화백은 서울에 올라올 때 마다 미진을 먼저 찾았다. 일년에 300일 넘게 오는 단골도 여럿 있다.
영업환경이 변하면서 이씨는 포기여부를 놓고 여러 번 힘든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럴 때마다 '고모'의 얼굴이 떠올랐고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곤 했다. 미진은 창업 50주년을 맞아 체인화를 시도하고 있다. 보름 전 김포시에 첫 분점을 냈다.
미진을 찾는 단골들은 메밀국수 가닥에 추억을 함께 섞는다. 맛에 대한 믿음이 늘 변함없기를 바라면서.